이경희 (18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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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희는 1880년 출생하여 1949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대구 협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청년학우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고, 1927년 신간회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경상북도 부지사 및 대구부윤을 역임했으며,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이경희는 1880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이며, 조선 개국공신 이문화(李文和)의 19대손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이주(李輈)의 11대손이다.[1] 1895년 대구 공산 소학교, 1901년 기호중학교를 졸업하고,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교육계에 종사하며 '지오'라는 호를 사용했다.[1]
시신은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가람봉에 안장되었다.
2. 생애
대구 협성학교와 안동 협동학교 교사로 교육구국에 힘썼으며, 대종교로 개종하였다.[1] 1909년 청년학우회 경성부지회, 1910년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했다.[1]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마련하고, 중국 심양에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만주 무송현에 둔전을 마련하여 군자금을 만들었다.[1]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 일행의 여비를 지원했다.[1]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자금과 무기 마련에 힘썼다.[1] 1923년 국내 잠입, 조선혁명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고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했으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년여 만에 가석방되었다.[1]
1927년 신간회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 및 경상북도 지회장을 맡았다.[1] 신간회 밀양지회 지원 중 검속되었고,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 활동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1] 한용운과 가깝게 지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했다.[1] 1942년부터 야산에 숨어 농부로 생활하며 미국의 소리 방송을 밀청했다.[1]
1945년 광복 후 경상북도 부지사 겸 대구부윤에 임명되어 행정 공백을 메웠고,[1] 미군정 민정관으로 위촉되었다. 독립촉성중앙회 및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 대종교 남사도본사 선범, 1949년 남선경제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1]
1949년 12월 4일 대구 자택에서 69세로 사망했다.[1]
2. 1. 초기 활동 (1880년 ~ 1910년)
1880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아버지 이병두(李柄斗)와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증영의정에 추증된 이문화(李文和)의 19대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주(李輈)의 11대손이다.[1]
소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895년 대구 공산 소학교에 입학하고, 1901년 공산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부로 올라가 기호중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한성 기호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였으나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을 포기하고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호를 '지오'라 하였는데, 이는 '나라 잃은 나는 못난이'라는 뜻이었다.[1]
2. 2. 교육 계몽 운동과 항일 비밀 결사 활동 (1905년 ~ 1919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긴다는 신념으로 고향으로 내려와 대구 협성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안동 협동학교의 교사를 겸임하여, 김동삼 등과 함께 안동 협동학교에도 출강하며 교편을 잡고 교육구국에 힘썼다.[1] 이 무렵 그는 유교 성리학에서 대종교로 개종하였다.[1]
1909년 윤치호,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고, 청년학우회 경성부지회의 회원이 되었다.[1] 1910년 5월 13일 독립운동가 구찬회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1] 구찬회와 같은 고향 출신이던 그는 한국통감부와 일본의 눈을 피해 구찬회의 시신을 미역 속에 숨겨서 경성에서 대구 무태로 운반하여 구찬회의 가족들에게 시신을 전달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1] 1910년 10월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청년학우회 한성지회의 일원으로 이동녕, 윤치호, 안창호, 윤치소, 이회영, 윤기섭, 이승훈, 김좌진,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고 회원이 되었다.[1] 이후 신민회의 비밀회의에 참여, 독립군 기지창건을 목적으로 자금을 마련하는데 동참했고, 105인 사건을 피해 바로 서간도로 망명하여 무관학교(훗날의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장사와 노동에 종사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돈을 모았다.[1]
동시에 현지 교민들의 문맹률을 보고 중국 심양에서 달신학교(達新學校)와 중국어 학교를 세워 학생, 청년들을 가르치고, 야학을 개설하여 성인들을 가르쳤다.[1] 이어 마련한 돈으로 만주 무송현에 둔전을 마련하여 다시 군자금을 만들고, 청장년을 훈련시켰다.[1]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의로 파견되는 김규식 박사와 일행의 차비와 여비로 일부 자금을 상하이로 보냈다.[1]
2. 3. 의열단 활동과 투옥 (1919년 ~ 1927년)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좌절되자, 이경희는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계획하였다. 지린성에서 김원봉, 김시현, 김지섭 등을 만나 의열단 조직에 참여하고 가입하여, 자금과 무기 마련에 힘썼다.[1]
1923년 이경희는 의열단의 비밀 거사 계획인 5월 거사에 참여하여 국내에 잠입하였다. 김원봉의 지령 아래 김지섭, 김시현 등과 함께 중국과 만주에서 무역 목적으로 들여오는 척 하면서 쌀가마에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 시계 6개와 뇌관 여러 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리에 대한 투항 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숨겨 안둥현에서 국내로 반입, 3월 15일 성공하였다.[1]
이경희는 김시현, 유석현 등에게서 〈혁명선언서〉와 투항 권고 격문 수백 장을 받아 경성부 시내 곳곳에 배포하고, 전국 각 도의 도지사와 경찰부에 발송하였다. 김시현, 유석현 등 의열단 단원들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할 것을 계획하고 준비에 들어갈 때, 이경희는 조선총독부 폭파를 맡았다.[1]
그러나 1923년 5월 조선총독부 폭파 직전, 이들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의 신고로 밀정이 따라붙어 동지 12명과 함께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테러 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이경희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년여 만에 가석방되었다.[1]
2. 4. 신간회 활동과 일제 감시 (1927년 ~ 1945년)
1927년 2월 경성으로 상경하여 허헌, 조병옥, 김병로, 이인, 허정숙 등과 함께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를 맡았다.[1] 신간회 경상북도지회가 결성되자 경상북도 지회장을 겸하였다.[1] 그 뒤 신간회 경상북도 대구부지회가 결성되자 대구부 지회장을 겸임하면서 한때 30여 세포와 만여 회원을 포섭, 가입시켜서 단체를 키웠다.[1] 1927년 12월 신간회 대구지회장 직을 부회장 최윤동에게 넘겨주고 평회원으로 활동했다.[1] 신간회 밀양지회 조직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불심검문을 받고 밀양에서 검속되었다.[1] 이후 신간회 밀양지회 산하 조직인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밀양경찰서와 총독부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았다.[1]
만해 한용운 등과 가깝게 지냈고 1939년 7월 12일 한용운의 회갑연에 참여했다.[1] 한용운 회갑연 참석자 방명록에는 오세창, 홍명희, 이경희 등 1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1] 그는 한용운의 환갑을 축하하는 친필 휘호 불택세류(不擇細流)라는 자를 지어 주었다.[1]
대종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로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으나 개종을 거부하였다.[1] 1939년부터 창씨개명령이 나오고 1940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나, 이경희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1] 1942년 여름 경성부 돈암동을 떠나 대구로 내려가 야산에 숨어 농부로 생활하였으며, 항일 단파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밀청하고 해방을 예상하였다.[1] 이때 그의 부인 조씨가 청도군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둘째 사위에게 보리쌀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였다.[1]
2. 5. 해방 이후 활동과 사망 (1945년 ~ 1949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일본인 도지사와 부지사 등이 사퇴하자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8월 16일 경상북도 부지사 겸 대구부윤에 임명되었다.[1] 대구부윤 우에노 히코하치(上野彦八)에게서 행정권과 치안권을 인수받았다. 9월 2일 미군정 주둔 후, 레이몬드 재노스키(Raymond A.Zanowski) 미 육군 대령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미군정 사령부 민정관으로 위촉되었다.
우익에 가담하여 1945년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회장 이승만과 부회장 김구의 친필 임명장을 받았다. 1945년 12월 독립촉성중앙회 경상북도지회 및 대구부지부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1월 대구부윤에 유임되었으나, 미 군정의 권위적인 정책에 환멸을 느껴 1946년 9월 4일 부지사, 대구부윤, 군정청 민정관직을 사임했다. 9월 5일 독립촉성중앙회 경북지부 후신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대종교 남사도본사 선범에 임명되었다. 1949년 7월 1일 남선경제신문사 제4대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1949년 12월 4일 대구 자택에서 69세로 사망했다.
3. 사후
그의 공적을 기려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광복회 대구지회 회관 앞 망우공원에는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공적비'가 설립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4. 상훈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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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이병두(李柄斗) | |||
어머니 | 경주 최씨 | |||
동생 | 이강희 | 1898년 2월 17일 | 1940년 | 독립운동가 |
부인 | 조씨 | 1896년 | ? | |
아들 | ? | |||
처남 | 조훈 | 1886년 10월 29일 | 1938년 1월 22일 | |
사돈 | 정운일 | 1884년 1월 16일 | 1956년 2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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